지난주에 〈오디세이〉를 봤다.
극장이 오랜만에 꽉 차 있었다. 8월 24일 기준으로 오디세이가 729만, 20일 연속 1위다. 먼저 개봉한 스파이더맨은 817만을 넘겼고 나홍진 감독의 〈호프〉도 452만이다. 세 편 다 봤다. 덕분에 8월이 풍성했다.
그중에서도 오디세이는 개봉 전부터 기다렸다. 나는 놀란 감독 영화를 좋아한다. 메멘토부터 배트맨 트릴로지, 인셉션, 인터스텔라까지 다 재밌게 봤다.
200만 피트
놀란은 〈오디세이〉를 전편 IMAX 필름 카메라로 찍었다. 장편 영화 최초다.
이게 어떤 일인지는 카메라를 보면 안다. IMAX 필름 카메라는 무게가 180킬로그램쯤 나간다. 옮기려면 강철로 보강한 달리가 필요하고 전담 인력이 여섯 명 넘게 붙는다. 소음도 어마어마해서 대사 장면을 그냥 찍을 수가 없다. 그래서 블림프라고 부르는 방음 하우징을 따로 만들어 씌웠다.
카메라가 워낙 크니까 배우 둘 사이에 그게 들어가면 서로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촬영팀은 거울을 짜 넣어서 배우들이 카메라 너머로 눈을 맞출 수 있게 만들었다. 맷 데이먼은 커리어에서 제일 힘든 촬영이었다고 했다.
촬영에 쓴 필름이 200만 피트가 넘는다. 길이로 치면 640킬로미터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길에 필름을 쭉 깔면 얼추 그쯤 된다. 촬영 일수 91일, 로케이션 6개국.
IMAX 필름 카메라는 1,000피트짜리 매거진 하나가 초당 24프레임에서 3분이면 다 돌아간다. 필름이 초당 5피트씩, 1미터 반 넘게 빨려 들어가니까 그렇다.
여기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화가 나온다. 톰 홀랜드는 촬영 초반에 놀란이 자기 연기를 싫어한다고 확신했다고 한다. 몇 분 지나지도 않아 자꾸 컷이 걸리는데 뭘 잘못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유는 연기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필름이 3분이면 떨어졌을 뿐이다.
200만 피트면 매거진 2,000통이고, 얼추 곱하면 6,000분이다. 100시간.
그리고 극장에 걸린 영화는 172분이다.
100시간을 찍어서 3시간을 남겼다. 97%를 버린 셈이다. 매거진 소모 속도로 역산한 값이라 실제 촬영 시간과 정확히 같지는 않겠지만 자릿수는 이쯤이다.
버리는 쪽이 일이다
처음에는 낭비처럼 읽혔다. 필름값도 만만치 않을 텐데.
조금 생각해보니 그게 편집이다. 좋은 영화는 좋은 장면을 많이 찍는다고 나오지 않는다. 찍어둔 것 중에서 골라내고 나머지를 버려서 나온다. 버리는 쪽이 일이고 감독의 판단이 들어가는 자리도 거기다.
나는 데이터를 다루는 회사에서 일하는데, 이 대목이 남 일 같지 않았다. 미팅에서 만나는 팀들이 대부분 같은 상태에 있다. 데이터가 없어서 못 하는 게 아니다. 쌓여 있는데 뭘 남기고 뭘 버릴지를 아무도 정해본 적이 없어서 못 한다.
무인 선박을 검증하는 기관과 미팅을 한 적이 있다. 원본이 35만 프레임인데 카메라와 레이더가 초당 찍는 횟수가 달라서 같은 순간끼리 시점을 맞추고 나면 3만에서 4만 장만 남는다고 했다. 열 장 중 아홉 장이 짝이 없어서 빠진다.
숫자만 보면 놀란과 비슷한 비율이다. 다른 게 하나 있다. 놀란은 그 97%를 버리기로 결정하고 버렸다.
놀란이 CG를 쓴 드문 순간
놀란은 웬만하면 실물로 찍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오디세이〉의 괴물들도 상당 부분 인형과 특수분장, 강제원근법으로 만들었다.
그런 그가 CG를 크게 쓴 장면이 있다. 〈인터스텔라〉의 블랙홀 가르강튀아다.
이 장면을 만들 때 제작진은 좀 이상한 방식을 택했다. 블랙홀처럼 보이는 그림을 그리는 대신 물리학자 킵 손에게 방정식을 받아 렌더러에 직접 집어넣었다. 특수효과사 더블 네거티브가 이 일을 하려고 DNGR이라는 렌더러를 따로 만들었다. 회전하는 블랙홀 주변의 휘어진 시공간을 빛다발이 어떻게 통과하는지를 실제로 계산하는 코드다.
대가가 있었다. 프레임 하나를 뽑는 데 최대 100시간이 걸렸고, 최종적으로 800테라바이트가 나왔다.
그럴듯한 그림 한 장이면 될 일에 저만큼을 썼다.
그런데 결과물이 논문이 됐다
여기서부터가 재미있다.
계산을 제대로 돌리고 나니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게 화면에 나타났다. 블랙홀 주변을 지나는 별빛이 어떻게 휘어 보이는지, 그때까지 누구도 이만큼 자세히 계산해본 적이 없었다. 제작진과 킵 손은 그 결과를 정리해서 〈Classical and Quantum Gravity〉에 논문으로 냈다.
영화 특수효과팀이 논문을 냈다.
그리고 2019년, 사건지평선망원경이 실제 블랙홀을 처음 찍었다. 그 계산이 크게 틀리지 않았다는 게 그때 확인됐다.
여기에 선이 하나 그어진다. 그럴듯한 그림을 만들면 소품이 되고, 물리를 제대로 넣으면 데이터가 된다. 화면에서는 둘이 비슷해 보이는데 쓸모는 완전히 다르다.
놀란은 물리를 껐다
이 이야기에는 뒤가 있다. 나는 이쪽이 더 좋다.
극장에 걸린 가르강튀아는 물리적으로 정확한 버전이 아니다.
실제 블랙홀이라면 원반이 저렇게 곱게 대칭이지 않다. 원반의 물질이 광속에 가깝게 돌기 때문에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면은 도플러 효과로 눈이 부시게 밝아지고 멀어지는 면은 어두워져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심하게 짝짝이다.
놀란은 그걸 알면서 뺐다. 관객이 화면을 보고 저게 뭔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양은 맞고 밝기는 틀린 원반이 극장에 걸렸다.
대신 물리를 전부 켠 버전은 따로 만들었다. 논문에 실린 건 그쪽이다.
같은 렌더러로 두 개를 만들었다. 하나는 사람이 볼 것, 하나는 계산에 쓸 것.
로봇은 극장에 안 간다
놀란의 선택은 옳았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그래도 된다. 보는 쪽이 사람이니까.
사람은 틀린 그림을 봐도 알아서 보정한다. 원반이 대칭이든 아니든 "아 저게 블랙홀이구나" 하고 넘어가고 이상한 게 있으면 이상하다고 느낀다. 관객에게는 화면 밖에 세상이 따로 있다.
로봇은 아니다.
로봇이 학습하는 이미지에는 화면 밖이 없다. 거기 담긴 게 세계의 전부다. 중력을 무시하고 떠 있는 물체, 마찰을 무시하고 미끄러지는 상자. 그런 걸로 배운 팔은 현장에 나가서 그렇게 움직인다. 사람 눈에는 멀쩡해 보이는 데이터가 문제인 이유가 여기 있다. 검수하는 사람이 걸러내지 못한다.
이걸 물리적 환각이라고 부른다. 요즘 피지컬 AI 이야기가 부쩍 늘었는데, 이 문제는 그만큼 언급되지 않는다.
페블러스가 하는 일
내가 일하는 페블러스가 하는 게 이 두 가지다.
하나는 놀란이 논문용 버전을 만든 쪽이다. 디지털 트윈 위에서 물리를 켜고 시뮬레이션을 돌려서 실제로 찍을 수 없는 학습 데이터를 만든다. 해안 경계 감시 환경 이미지 13만 5천 건을 그렇게 만들었다. 실제로 그 상황을 찍으려면 배와 사람과 날씨를 전부 동원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놀란이 97%를 버린 쪽이다. 쌓아둔 학습 데이터에서 중복과 편향과 잘못 붙은 라벨을 찾아내고, 남길 것을 고른다.
이 순서가 뒤집히는 걸 지난 몇 달 동안 꽤 봤다. 모델을 먼저 정하고 데이터는 나중에 맞추는 식이다. 그러면 대개 데이터에서 멈춘다.
관객으로
〈오디세이〉를 보고 나오면서 제일 오래 남은 건 특정 장면이 아니었다. 이걸 만든 사람이 100시간을 찍어서 3시간만 남기기로 했다는 사실이었다.
요즘은 뭐든 더 많이 모으는 쪽이 이기는 것처럼 이야기된다. 데이터도 그렇고 콘텐츠도 그렇다. 그런데 놀란은 반대로 갔다. 필름 200만 피트를 쓰고 97%를 버렸고, 블랙홀 하나에 800테라바이트를 쓰고는 그중 물리를 일부러 껐다.
많이 만드는 것과 잘 고르는 건 다른 일이다. 그걸 3시간 동안 극장에서 보고 온 것 같다.
하나 덧붙이자면, 페블러스 이정원 부대표님이 영화에 조예가 깊으시다. 혹시 만나실 일이 있으면 데이터 이야기만 하지 마시고 영화 이야기도 한번 꺼내보시길 권한다. 아마 즐거운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다.